자유 러시아 임시정부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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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
Времен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свободной Россіи[1]
망명정부
국기 국장
Да здравствуетъ Россі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자유로운 나라, 러시아 만세![2]
국가 гимнъ свободной Россіи
자유 러시아의 찬가
[3][4]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명목상)
하얼빈(사실상)
정치 체제 공화제, 대통령제(집단지도체제)

역사적: 일당제, 권위주의, 파시즘(논란 있음)
정부수반 최고지도자 → 총리 → 대통령
대통령 알렉산드라 이바노바(2022~)[5]
여당
언어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민족 러시아인
하얼빈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

개요

Снова нападай на Сѣверъ, спасай соотечественниковъ,
снова нападай на Сѣверъ, спаси свою Родину!
북방을 다시 공격해서 동포를 구하라, 북방을 다시 공격해서 조국을 구하라!
그레고리 세묘노프 전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 최고지도자,
망명지 하얼빈에서 노환으로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6]

1956년 중국으로 투항한 그레고리 세묘노프 장군을 필두로 중국의 백계 러시아인들이 구성한 망명정부이다. 현 체제의 타도와 자유롭고 반공적인 러시아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설립과 역사

초기

그레고리 세묘노프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는 구 백군 출신의 장교였던[7] 그레고리 세묘노프가 1956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단체이다. 세묘노프 장군은 본래 러시아 내전 당시 자바이칼 지방 일대를 통제하던 백군 장교였으나 자신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폭정을 일삼아 지역민들의 반발을 사 결국 적군에게 쫒겨 중국으로 망명한 인물로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협력하였으나 국민정부의 남만주 수복작전 당시 중국군에 체포되었다.중국군은 톈진에서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하고 만주국에 부역한 세묘노프를 소련으로 송환하려고 했으나 국공내전이 재개되면서 장궈타오와 신장 소비에트를 지원하던 소련과의 관계가 냉랭해졌고 세묘노프의 송환은 무위로 돌아갔다.

1950년 몽골 전쟁으로 몽골을 다시 영향권 안에 편입시킨 중국과 장제스는 차후 청나라의 영역이던 외만주와 투바 지역의 수복또한 계획하게 되었다.(녹오계획, 綠烏計畫)[8] 그러나 투바와 외만주 모두 러시아(소련)의 통치하에 들어간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고 중국계 상당수가 추방당한 상황에서 중국이 이 지방을 다시 통치한다고 하면 해당 지역의 거주민들인 투바인들과 러시아인들이 반발 할 것 이라는 당착에 부딪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는 해당 계획을 폐기하였으나 계획 자체는 명칭을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으로 알려졌고 극대노한 베리야 서기장은 소련으로 망명한 중공 잔당들을 후원하여 신장과 헤이룽장성 일대에서는 3주에 1번 꼴로 총격전이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에 장제스 총통과 중국 정부는 소련에 받은것을 똑같이 돌려주자는 심정으로 소련 정권에 반대하는 백계 러시아인들을 모아서 중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세묘노프를 수반으로 한 정부를 수립하니 이것이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의 시작이었다.

사실 설립 초반에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는 현재도 국내에 존재하는 일부 관변조직들과 같이 유명무실한 조직에 불과했다. 일단 중국내의 백계 러시아인 사회는 만주국 시절 일본의 탄압과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및 신장 소비에트의 소련 송환으로 인해 붕괴 직전까지 몰린 상황이었고 수반으로 내세운 세묘노프는 위에서 보다시피 백군 시절의 폭정과 친일 행위 때문에 백계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중국 정부 마저도 그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설립 이후 10여년간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는 외만주 지역에 삐라를 뿌리거나 반공 행사에 연사로 참여하는 등의 행보만을 보이며 존재감이라곤 전혀 없는 단체로 존속해나갔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행보

장제스 총통과 세묘노프 장군(1969년)

그러나 1966년 소련에서 희대의 뻘짓인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홍위병들의 문화반달리즘과 인텔리 도륙은 모스크바에서 저 멀리 떨어진 극동에서조차 예외가 아니었고 수많은 소련인들이 몽골과 중국, 심지어는 한국과 일공으로까지 건너오기 시작한다. 이들은 대부분 적백내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였으며 외만주 출신이었기에 세묘노프 장군의 실정과는 관계가 없었고 이들이 대규모로 중국에 정착하면서 중국내 러시아인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고향땅에서 홍위병들에게 처절하게 당하고 온 이들은 공산당 정권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자발적으로 자유 러시아 측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달라진 분위기와 세묘노프에 대한 러시아계 중국인들의 지지를 확인한 중국 정부는 소련이 혼란에 빠진 이 시점에 녹오계획을 실행 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임시정부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들의 무장을 허용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자체적인 무장조직인 '자유 러시아군(Свободная русская армія)'이 조직되기도 하였고 이들은 국경을 넘어 소련측에 대한 유격전을 실시할 만큼 성장하였다.

실제로 당시 임시정부는 국광계획(Проектъ національной славы, National Glory Project)를 입안하는 등 러시아 전역까지는 무리더라도 극동일대에 대한 실질적인 수복시도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문화대혁명으로 박살이 났다 한들 소련군은 당시 세계 2위를 자랑하던 강군이였고 이런 소련군을 상대로 아무리 잘쳐줘도 빨치산+α 수준인 자유 러시아군이 극동 전역을 탈환하는 것은 무리였다. 무엇보다 이들을 지원해주는 중국 정부도 시간이 지나면서 외만주에 대한 관심 자체가 줄어들었고 불필요한 마찰을 원하지 않던 미국 정부가 중국 측에 자제를 요구하면서 임시정부의 무장 활동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1975년 이들의 뒷배였던 장제스 총통이 서거하고 얼마되지 않아 1975년 제2차 전민항쟁으로 중국이 민주화되며 '본토 수복 사업'은 사실상 중단되고 만다.

현대

임시정부 최초의 여성수반 알렉산드라 이바노바

1976년 1월 6일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 그레고리 세묘노프가 사망하고 동년 9월 9일 라브렌티 베리야 서기장이 사망했다. 베리야 서기장의 사망 이후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당내 개혁파인 안드로포프와 군부의 지지를 받아 10월 10일 4인방을 전격 체포하면서 문화대혁명이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고 세묘노프라는 지도자와 베리야-문혁이라는 항쟁 명분이 모두 사라진 이들은 곧 극심한 내분을 겪게 되었다.

기존 세묘노프와 함께 임시정부와 러시아인 사회를 장악하고 반대파를 탄압한 국가인민당(Національная народная партія)과 임정내 야권세력들의 연합체인 입헌민주당(Конституціон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ія)[9]의 다툼이 거세졌고 한동안 임정은 꼭두각시 최고지도자 이오시프 이미누프(Іосифъ ​Иминуфъ​)를 내세워놓고 내부적으로는 정치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런 행보에 상당수의 러시아계 중국인들이 이탈하였고 중국에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위시로한 공산당이 집권하고 데탕트 기조가 이어지며 무장이 해제됨과 동시에 지원금도 줄어들었다.

결국 1979년 입헌민주당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최고지도자직을 폐지하고 세르게이 코즐로프를 총리로 한 지도부가 구성되었으나 입민당내의 불화와 국가인민당의 여당 흔들기로 인해 1년 3개월 만에 붕괴되었고 1982년 5년 연임제의 대통령제 개헌을 골자로한 신헌법이 통과와 함께 콘스탄틴 로마노프[10]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혼란은 진정되었다. 1989년 크렘린 사태 이후에는 소련 내의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소련 본토에서 새롭게 중국으로 이민을 오는 이민자들이 늘어나며 러시아계 중국인들 사이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추세다, 그러나 푸틴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야당인 자유민주당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강해지고 소련내 민주주의가 붕괴되어 감에 따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2022년 알렉산드라 이바노바 최초의 여성수반으로 선출된 가운데 푸틴 서기장의 3연임이 확정되고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2023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에는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소련에서 진행되는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정치

자유 러시아 국가두마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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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야당
중립
무소속 3석
재적 75석 | 공석 0석

역대 정부수반

자유 러시아 임시정부 수반
이름 임기 선거 정당
시작일 종료일
1대

그리고리 세묘노프
Григорій Семеновъ
(1890 ~ 1976)
1956. 10. 22 1976. 1. 6 19년 76일 국가인민당 [11]
2대

이오시프 이미누프
Іосифъ Иминуфъ
(1897 ~ 1985)
1976. 1. 6 1979. 3. 31 3년 86일 국가인민당 [12]
3대

세르게이 코즐로프
Сергѣй Козловъ
(1938 ~ 2023)
1979. 4. 1 1980. 7. 15 1년 75일 입헌민주당 [13]
집단지도체제 (1980. 7. 15 ~ 1982. 1. 31)
4대

콘스탄틴 로마노프
Константинъ Романовъ
(1927 ~ 2011)
1982. 2. 1 1992. 1. 31 10년 국가인민당 [14]
5대

드미트리 케메로프
Дмитрій ​Кемеровъ​
(1966 ~ )
1992. 2. 1 2002. 1. 31 10년 사회민주당
6대

세르게이 코즐로프
Сергѣй Козловъ
(1938 ~ 2023)
2002. 2. 1 2012. 1. 31 10년 입헌사회민주당 [15]
7대

드미트리 메이코프
Дмитрій ​Майковъ​​
(1956 ~ )
2012. 2. 1 2022. 1. 31 10년 국가인민당
8대

알렉산드라 이바노바
(Александра ​Иванова
(1964 ~ )
2022. 2. 1 - 현직 입헌사회민주당

  1. 본토식 철자법으로는 Времен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свободной России
  2. 본토식 철자법으로는 Да здравствует Росси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3. 본토식 철자법으로는 гимн свободной россии
  4. 세묘노프 집권기에는 시온의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Коль славенъ нашъ Господь въ Сіонѣ)를 사용했으며 이외에도 반공반소가(Анти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и антисоветская песня)등의 노래또한 사용된다
  5. 본명은 알렉산드라 보리소비치 이바노바(Александра Борисовича ​Иванова), 임정 최초의 여성 수반이다.
  6. 한편 해당 발언에 대해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모든 반동파들은 양치기 소년에 불과하다!"라며 세묘노프 장군을 조롱했다.
  7. 최종계급은 중장.
  8. 본래는 외환계획(外還計畫)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으나 정보의 누출을 우려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이 외만주를 부르던 명칭인 젤레니 클린(녹색 쐐기)에서 따온 녹(綠)과 청나라 시대 투바의 이름인 탕누 우량하이(唐努烏梁海, 당노오량해)에서 따온 오(烏)를 합친 녹오계획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9. 러시아 공화국 시기 입헌민주당의 후신을 표방했다.
  10. 로마노프 왕조의 먼 친척이라고 한다.
  11. 초대 최고지도자(верховный правитель)
  12. 마지막 최고지도자
  13. 초대 총리
  14. 초대 대통령
  15. 초대 총리와 동일인